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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학도병, 양동작전, 생존자)

by jtec0206 2026. 4. 20.

영화관을 나오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는데,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음료를 들고 밤거리를 걷는 제 모습이 갑자기 낯설어졌습니다. 2019년 개봉한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전, 평균 나이 17세의 학도병 772명이 투입된 장사상륙작전을 바탕으로 한 실화 영화입니다. 보고 나서 한참 동안 창문만 바라봤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밤이 당연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포스터

열일곱살 학도병이 전선에 서야 했던 이유

1950년 9월 13일 밤, LST 문산호가 영덕 장사리 해안을 향해 출항했습니다. LST란 전차상륙함(Landing Ship, Tank)을 의미하는 군용 선박으로, 해안에 직접 접안하여 병력과 장비를 상륙시키는 데 쓰입니다. 그 배에 탄 이들은 훈련 기간이 단 2주에 불과한 학도병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전투 장면보다 아이들의 눈빛이 먼저 기억에 남았습니다. 총을 쥔 손이 아니라, 겁을 참으며 입술을 꽉 다문 그 표정이요. 좋은 전쟁영화는 총성이 크다고 좋은 게 아니라, 전쟁이 한 사람의 나이를 얼마나 잔인하게 당겨 버리는지 보여줄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제 주변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친구, 특히 보육원에서 나온 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홀로 서야 했던 이들. 전쟁과 생계는 물론 다른 이야기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직 감당할 나이가 아닌데 시대와 환경이 먼저 사람을 밀어 올려 버린다는 것. 누군가는 그걸 책임감이라고 칭찬하지만, 저는 마냥 아름답게만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陽動作戰)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양동작전이란 적의 시선과 병력을 실제 주공격 방향이 아닌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군사 전술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학도병들은 적을 속이기 위한 미끼 역할을 맡은 셈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의용군의 규모와 희생에 대한 기록은 국가보훈부에도 남아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정식 군번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출처: 국가보훈부).

어린 희생을 숭고하다고 부르는 일과, 그런 희생이 필요했던 구조를 함께 비판하는 일은 동시에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만 하면 추모는 쉬워도 반성은 빠집니다.

양동작전에 이름 없이 소모된 사람들

장사상륙작전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은 장면은 화려한 전투 씬이 아니었습니다. 류태석 상사가 터널 폭파를 위해 홀로 남는 장면, 선장과 선원들이 암초에 걸린 문산호에서 줄을 묶기 위해 몸을 던지는 장면이었습니다. 결과는 작전 성공이지만, 그 성공 뒤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소모가 쌓여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어느 조직에서든 성과는 앞에 선 몇 사람의 이름으로 남습니다. 밤새 자료를 정리하고 준비한 사람은 발표가 끝나면 기억에서 빠지고, 윗선의 결정만 남는 구조. 장사리를 보면서 "잊혀진 영웅들"이라는 부제가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는 늘 결과를 기억하고, 그 결과 뒤편의 소모는 한참 뒤에야 돌아봅니다.

영화 속에서 2중대 분대장 최성필이 민가에서 생포한 사람이 자신의 사촌동생이었다는 설정은 그냥 극적 장치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이 서로의 총구 앞에 서야 했던 한국전쟁의 비극성을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내전의 비극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주제입니다(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이 영화에서 특히 주목한 구조적 포인트는 작전의 목적이 처음부터 양동, 즉 희생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었다는 점과 약속된 포격 지원과 항공 지원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 철수 과정에서 마지막 엄호 병력이 버려졌다는 점, 그리고 이명준 대위는 귀환 후 군검찰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다는 점이다.

이 네 가지를 연결해서 보면, 영화는 단순히 "숨은 영웅의 승리"를 그리는 게 아닙니다. 이건 희생의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살아남은 생존자의 몫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사자가 아닌 생존자 국만득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노년의 그가 장사리 해안에 서서 전우들을 떠올리는 그 엔딩이, 전투 장면보다 훨씬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실제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큰 사고를 겪은 뒤 혼자 살아남은 사람,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자신만 비교적 덜 다친 사람. 이런 이들의 공통된 감정은 이상하리만큼 비슷합니다. "내가 왜 남았지?"라는 질문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생존자 죄책감(Survivor's Guilt)이라고 부릅니다. 생존자 죄책감이란 재난이나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스스로의 생존을 죄처럼 느끼며 지속적인 정서적 고통을 경험하는 심리 상태를 뜻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이후에도 생존자들 사이에서 이 감정은 반복적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전쟁영화의 눈물은 종종 전사자에게 향하지만, 실제로 더 길게 이어지는 고통은 살아남은 사람의 몫일 때가 많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무거웠던 건 누가 죽었느냐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냈을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영화에 비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떤 장면은 감정의 방향을 너무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관객이 알아서 느끼도록 두기보다, "지금 슬퍼해야 합니다"라고 손을 잡아끄는 순간들이 있고, 일부 인물은 충분히 입체적으로 살아나지 못하고 상징처럼만 쓰입니다. 완성도만 놓고 보면 걸작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영화를 낮게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영화가 있습니다. 잘 만든 영화와 필요한 영화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장사리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은 보고 나면 한동안 일상이 다르게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저도 영화를 본 날 밤, 괜히 창문을 오래 바라봤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밤이 누군가의 이름 없는 죽음 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사를 추모한다는 건 업적을 칭찬하는 것만이 아니라, 누가 너무 일찍 사라졌는지를 오래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관심이 생기셨다면 영화와 함께 실제 장사상륙작전의 기록을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영화보다 더 묵직한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장사리:%20잊혀진%20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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